콘스탄티노플 성벽

배가 산으로 올라가자, 천년 성벽은 무너졌다

[국방일보 기획칼럼 -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14> 터키의 콘스탄티노플 성벽

배가 산으로 올라가자, 천년 성벽은 무너졌다

<14> 터키의 콘스탄티노플 성벽

동로마제국 삼중벽 철옹성 오스만제국에 함락…
무너진 성벽 사이로 결국 르네상스 꽃 피어
콘스탄티누스 1세가 313년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지정
413년 세워진 3중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20회 넘는 외침도 견뎌내
1453년 술탄 메흐메트 2세에 의해 동로마 멸망, 오스만 제국 새로운 수도로 선포

터키의 최대 도시 이스탄불은 동로마제국(비잔티움)부터 오스만제국에 이르기까지 15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다. 그리스 시대인 기원전 660년 비잔티움으로 불렸다가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동로마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현재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로마는 476년 멸망했지만, 동로마는 그로부터 1000년을 더 존속했는데 이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천혜의 지형에 난공불락의 성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가 건립한 3중 성벽

330년 5월 11일 로마제국을 재통일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콘스탄티노플의 외곽을 방어하고자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지었다. 413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콘스탄티노플 성벽 밖으로 도시가 팽창하자 서쪽을 중심으로 새로 성벽을 쌓았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라고 불린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3중으로 된 총 6.5㎞ 길이의 테오도시우스 성벽, 최대 폭 800m인 금각만(Golden Horn·이스탄불을 끼고 도는 해협 어귀의 이름)과 면한 7㎞의 해안 성벽, 강풍으로 선박의 접근이 어려운 마르마라 해안에 지은 7.5㎞의 성벽으로 구성됐다. 약 20㎞의 성벽이 삼각형으로 도시를 방어하는 형태다.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함락

콘스탄티노플은 폭이 1㎞가량, 가장 좁은 폭은 750m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경계로 동서양 교역이 시작되는 곳이기에 경제와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했는데 해협을 강처럼 건널 수 있어 군대를 옮기기 쉬웠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은 건립 이후 무려 20회가 넘는 침공을 받았지만, 오스만제국에 점령당하기 전 함락된 것은 단 한 차례에 그친다. 바로 제4차 십자군 원정(1202~1204)이다.

십자군 전쟁은 1095년부터 1291년까지 서유럽 그리스도교도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8회에 걸쳐 감행한 대규모 원정이다. 제4차 십자군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이슬람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목표로 한 원정을 승인하면서 이뤄졌다. 그러나 원정을 위해서 베네치아에 집결한 병력은 예상보다 훨씬 적었고, 베네치아에 지급할 수송비도 조달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베네치아공화국은 십자군 지휘부를 설득해 기독교 도시인 달마티아의 자라(헝가리 보호령)를 약탈하도록 했다. 이어 방향을 돌려 1204년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때는 성이 함락된 것이 아니라 비잔티움제국 스스로 문을 열어주면서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것은 십자가 아래 모여서 황금을 목적으로 같은 기독교도를 공격한, 오욕으로 점철된 사건으로 알려졌다. 

이후 동로마제국에서는 플랑드르 백작인 보드앵이 황제로 추대되면서 라틴제국(1204~1261)이 성립됐지만, 국민의 지속적인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1261년 비잔틴 성직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니카이아 제국과 튀르크족의 습격으로 멸망했다.

동로마제국 최후의 날, 1453년 5월 29일

동로마제국은 세력이 대폭 약화하면서 끊임없는 위협에 직면했다. 영토는 날이 갈수록 줄어 1450년 콘스탄티노플 주변 지역과 펠로폰네소스 반도만이 남았다. 영토의 대부분은 오스만제국의 손안에 들어가 있었다. 14세기에 등장한 오스만제국은 동로마제국이 약화한 틈을 타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1354년 갈리폴리를 점령해 유럽에 발을 뻗은 후 1362년 아드리아노플을 수도로 삼았다. 콘스탄티누스 11세(1405~1454)는 오스만제국의 위협을 느껴 서방 기독교 국가에 원조를 요청했지만,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으로 지쳐 있었고, 독일 제후들 또한 내부 분쟁으로 동방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제노바공화국만이 군대를 보냈다.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1432~1481)는 1451년 즉위한 뒤 10만 대군을 모아 1453년 4월 6일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섰다. 콘스탄티노플이 적함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금각만 입구를 쇠사슬로 채우자 오스만 군대는 산을 깎아 길을 내고 나무를 깔고 황소를 동원해 전함들을 옮겼다. 산에서 내려오는 70여 척의 함대를 보고 콘스탄티노플 군은 겁에 질렸다. 술탄은 콘스탄티노플에 대포를 제안했다가 쫓겨난 헝가리인 우르반을 기용해 길이 8m, 무게 19톤의 초대형 철제 대포를 만들어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공략했다.

1453년 5월 29일은 비잔틴-오스만 전쟁(1265~1453)의 마지막 날이다. 한때 1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며 번성하던 콘스탄티노플에 남은 인구는 5만여 명, 군대는 5000여 명에 불과했다. 술탄의 친위대 예니체리 군단이 메소티키온 성벽을 돌파하면서 도시의 운명은 결정됐다. 군대를 지휘하던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고, 동로마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역사의 변화 부른 동로마제국 멸망

메흐메드 2세는 오스만제국이 로마제국의 후계자임을 선포하며 콘스탄티노플을 터키식인 이스탄불로 개명하고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찬란한 그리스 정교의 건축물들은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로 변했다. 동로마의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서유럽으로 망명해 르네상스가 일어날 토대를 마련했다. 오스만제국의 대포에 놀란 서양은 총포와 화약 연구에 몰두했다. 유럽의 중세는 막을 내렸고 근대로 접어들었다. 이스탄불은 오스만제국 말기인 1912년 1차 발칸전쟁 때 불가리아군이 콘스탄티노플의 최후 방어선이었던 차탈자(Chatalja) 선까지 진격해 위협한 적은 있으나 공방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3년 그리스는 이스탄불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했으나 터키 지도자 케말 아타튀르크는 일축하며 수도를 앙카라로 옮겼다. 이스탄불 구시가지에 남아있는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동로마제국 천 년의 영광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19년 9월 30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90930/1/BBSMSTR_000000100082/view.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