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렘린 궁전

800여 년 영광·오욕 함께한 러시아의 ‘붉은 심장’

[국방일보 기획칼럼 -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8> 러시아의 크렘린 궁전

800여 년 영광·오욕 함께한 러시아의 ‘붉은 심장’

<8> 러시아의 크렘린 궁전

12세기 요새로 출발해 왕이 머무르는 거처로
크렘린(kremlin)은 ‘가파른 바위’나 ‘성곽’ 의미
붉은성벽, 공산주의와 냉전, 철의 장막 등 상징

모스크바에 있는 크렘린 궁전은 중세 시대 지어진 건축물로 러시아의 심장이다. 크렘린의 높다란 성벽은 온통 붉은색이기에 한때 공산주의와 냉전, 철의 장막 등을 상징하기도 했다.

12세기 요새로 출발해 왕이 머무르는 거처가 됐다. 모스크바는 1712년 표트르 1세가 러시아의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며 수도의 기능을 잃었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다시 수도가 됐다. 크렘린 궁전 내부에는 대통령 집무실이 있으며 성벽 인근에는 레닌 영묘와 스탈린을 비롯한 지도자들의 묘가 있어 러시아 정치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돌고루키 대공이 지은 나무 요새

러시아어로 크렘린(kremlin)은 ‘가파른 바위’나 ‘성곽’을 의미한다. 1156년 키예프 공국의 유리 돌고루키 대공(1099~1157)이 모스크바에 나무로 된 요새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러시아 주요 도시에 크렘린이 생겨났다. 크렘린은 타타르스탄 연방공화국의 카잔시를 비롯해 여러 곳에 있지만, 러시아어 대문자로 시작할 때는 모스크바의 크렘린을 가리킨다.

14세기 모스크바 공국의 드미트리 돈스코이(1350~1389) 대공이 크렘린 성벽을 흰 석조 건물로 개축(기존 건축물의 전부 또는 일부를 철거하고 그 대지 안에 종전과 같은 규모의 범위 안에서 건축물을 다시 짓는 것)했다. 이어 15세기 이반 3세는 크렘린을 이탈리아 건축가들로 하여금 오늘날과 같이 웅장한 석조 건물로 증축했다. 성채 윤곽은 모스크바강을 따라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크렘린 궁전은 높이 5~19m, 두께 3.5~6.5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벽 총 길이는 2235m. 다양한 20개의 군사용 탑이 있는데 원래 용도는 전투와 감시초소였다.

폴란드군의 농성전

크렘린은 폴란드에 의해 침공당한 전쟁사가 있다. 17세기 러시아 차르국이 무정부 상태에 빠져 내전으로 치닫던 시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러시아에 진출해 전쟁을 벌였다. 폴란드-모스크바 전쟁 또는 가짜 드미트리 전쟁(1605~1618)이라고 한다. 연방군은 1610년 7월 4일 클루시노 전투에서 러시아와 스웨덴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후 폴란드군은 크렘린으로 입성했다.

1611년 초 반폴란드 연합군이 형성됐는데 1차 국민군이라고 부른다. 당시 국민군은 수만 명에 이르렀고 폴란드군은 3000명밖에 되지 않았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폴란드군은 크렘린에서 농성전을 벌였다. 여러 세력의 연합체였던 1차 국민군은 내분으로 와해됐다. 1611년 가을,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푸줏간 주인이던 쿠즈마 미닌은 시민을 상대로 폴란드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에 호응한 시민들은 1차 국민군에 참여했다가 부상으로 요양 중이던 드미트리 포자르스키 공작을 군사령관으로 추대했다. 이로써 탄생한 2차 국민군은 1612년 크렘린으로 진격해 폴란드군을 몰아냈다. 1618년 12월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의 전쟁은 데울리노 휴전으로 종결됐다.

미닌과 포자르스키 동상

1818년 나폴레옹과의 전쟁 이후 러시아의 애국심을 상기하자는 의미에서 건축가 이반 마르토스가 폴란드 전쟁의 영웅이었던 미닌과 포자르스키 동상을 크렘린과 맞닿아 있는 붉은 광장에 설치했다. 높이 9m에 이르는 이 동상은 미닌이 포자르스키에게 검을 건네는 형상이다. 포자르스키는 예수의 형상이 새겨진 방패를 든 채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동상 아래에는 ‘시민 미닌과 포자르스키에게 러시아가 감사의 마음을 전하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동상은 붉은 광장 한가운데 있었지만, 소련 시절 공산당 집회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성 바실리 대성당 앞으로 옮겨졌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1812년 9월 7일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서 120㎞ 떨어진 보로디노에서 러시아의 쿠투조프 장군과 전투를 벌였다. 두 나라 모두 많은 사상자가 생겼지만, 어느 한쪽도 승리하지 못했다. 1812년 9월 14일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날 밤, 이미 시내는 불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야 불길을 잡았지만, 연이은 화재가 9월 18일까지 발생해 모스크바 건물의 70% 이상이 소실됐다. 이때도 크렘린 궁전은 석조 건물이라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화재를 진압한 후 크렘린 궁전에 머무르면서 알렉산드르 1세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알렉산드르 1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군대는 오랜 원정으로 인한 피로와 식량 부족 그리고 추위로 인해 결국 모스크바에서 철수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던 당시의 흔적은 크렘린 곳곳에 남아있다. 트로이츠카야 탑의 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표트르 1세의 병기고가 있다. 이 앞에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군으로부터 빼앗았다는 875문의 프랑스제 대포들이 전시돼 있다. 스파스카야 탑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맞는 개선문으로도 사용됐는데 나폴레옹군이 진입할 때 진군나팔 소리를 울렸던 곳이다. 쿠타피아 탑은 나폴레옹군이 퇴각할 때 거친 문이다.

제2차 대전 때 희생된 무명용사의 묘

크렘린의 서쪽 벽을 따라 내려가면 ‘꺼지지 않는 불꽃’ 재단이 나온다. 이곳에는 196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먼저 점화된 후 모스크바로 옮겨와서 계속 타오르는 불꽃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사자와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크렘린 궁전은 러시아의 과거이자 현재 그리고 미래로서 오늘도 그들의 역사를 계속 써내려가고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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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국방일보 2019년 8월 19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90819/1/BBSMSTR_000000100082/view.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