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부예 성

프랑스 랑부예 성, 나폴레옹의 치욕과 드골의 영광 함께 하다

[국방일보 기획칼럼 -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20> 프랑스의 랑부예 성

<20> 프랑스의 랑부예 성

워털루 전투서 패한 나폴레옹
황제 포기각서 서명·마지막 밤 보내
노르망디 상륙 작전 후  성공하자
드골, 정오의 방에서 파리탈환 결정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50㎞ 떨어진 랑부예(Rambouillet·‘헝부이에’로도 발음된다) 성은 프랑스 근현대사의 주요 무대다. 

나폴레옹 1세가 1815년 워털루 전쟁에서 패하고 이곳에서 황제 포기각서에 서명했고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을 보낸 성이다. 랑부예 성의 서쪽은 프랑스 북쪽 최전방인 노르망디 지역과 접하고 있는데,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드골 장군이 독일에 점령당한 파리를 수복하기 위해 이곳에서 작전을 결정했다.

14세기에 지어진 이 성은 18세기 루이 14세가 사들여 오늘날의 모습으로 증축했다. 오늘날 프랑스식 정원과 큰 공원으로 둘러싸인 2만㏊(약 6000만 평)에 달하는 큰 규모의 부지에 자리 잡은 이 성은 국가 소유로 1896년부터 2009년까지 프랑스 대통령의 공식 여름 휴양지로 사용됐으며, 현재는 프랑스 문화부가 관리하는 유명 관광지 중 하나다.

‘100년 전쟁’ 휘말리며 주인 바뀌어

1368년 샤를 5세의 신하인 장 베르니에가 랑부예 숲의 해자(垓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로 둘러싸인 성을 구매해 1374년에 요새로 탈바꿈시킨 것이 랑부예 성의 시초다. 1384년부터는 앙젠느 가문이 이 성을 구매해 소유자가 됐다. 랑부예 성은 프랑스와 영국이 프랑스를 전장으로 해서 벌인 ‘100년 전쟁’에 휘말리며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1425년 6월 프랑스의 살리스버리 공작이 점령했고 1427년과 1428년에는 영국군이 점령했다. 전쟁 후 15세기 후반에서야 프랑스 앙젠느 가문의 소유로 되돌아왔는데, 100년 전쟁에 건물이 불타고 파괴된 성을 프랑수아 1세의 신임을 받던 장 앙젠느가 정원을 넓히고 울타리를 치면서 보수했다.

이 성에서 프랑수아 1세가 1547년 3월 31일 임종했는데 이 왕은 이탈리아를 정복하고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수차례 전쟁을 벌였으며 말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그의 작품 ‘모나리자’를 프랑스로 오게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1705년 루이 14세가 아들인 툴루즈 백작을 위해 이 성을 샀다. 그 후 툴루즈 백작이 해자를 없애고 정원과 운하를 설치했다. 그리고 1783년 루이 16세가 이 성을 사들여 랑부예 숲을 사냥터로 만들었다.

나폴레옹 1세의 전쟁사와 함께한 성

1804년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 1세는 랑부예 성을 방문한 후 거처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황제는 여러 단계의 공사를 직접 진두지휘했고 산책길도 만들며 정기적으로 이곳에서 생활했다.

1805년 나폴레옹 1세는 건축가 기욤 트레파트에게 성을 재건하라고 의뢰한 뒤 조세핀과 이혼한다. 이후 1810년 2월 23일 오스트리아의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황녀인 마리 루이즈에게 청혼하고 1811년 5월부터 이 성에서 새로운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1811년 나폴레옹 1세와 마리 루이즈 사이에 ‘로마의 왕’으로 불리는 애글롱이 태어났다. 다음 해 나폴레옹은 아들에게 주기 위해 ‘로마 왕의 궁전’을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이끈 프랑스군이 1812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이후 몰락의 길을 걷고 1814년 영국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로 구성된 연합군에게 파리를 점령당했다. 그 후 나폴레옹이 폐위돼 지중해 엘바 섬으로 유배를 가면서 이 성의 공사는 중단됐다.

잘 알려져 있듯이 1815년 2월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고 파리에 입성해 다시 권력을 장악한 뒤 그해 6월 벨기에 남동쪽 워털루에서 12만5000명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에 대항해 전투를 벌이지만 처참하게 패배했다. 그 후 나폴레옹은 랑부예 성에서 황제 포기각서에 서명하고 영국으로 망명길을 떠나기 전인 1815년 6월 29일 성에서 마지막 하룻밤을 쓸쓸히 보냈다. 당시 나폴레옹이 사용하던 침실과 목욕실에는 여전히 그의 상징인 ‘N’자와 일벌 문양이 남아있다.

프랑스 왕정복고 이후 루이 18세가 황제로 즉위했는데 루이 18세는 동생인 샤를 10세와 함께 이곳에서 사냥을 즐겼다.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왕인 샤를 10세는 1830년 7월 26일 사냥을 즐기고 파리로 돌아가다가 프랑스 혁명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회군했지만, 결국 혁명군들에게 둘러싸여 왕위 포기문서에 서명했다. 1852년 쿠데타로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이 성은 시민들의 공공자산으로 선포됐다. 1883년부터는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의 접대소로 이용되다가 1886년 2월 23일부터 2009년까지 대통령의 공식 여름휴가 장소로 지정된다.

드골 ‘정오의 방’에서 파리 수복 작전 결정

랑부예 성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본격적으로 세계 역사 무대에 등장한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2차 대전이 발발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은 프랑스군과 1개월간의 전투 끝에 파리에 입성하면서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했다. 이때 샤를 드골(1890~1970) 장군은 영국으로 망명해 대독 항쟁을 주장하면서 ‘자유프랑스민족회의’를 조직했다. 1940년 6월 18일 드골은 BBC 라디오를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나치 독일에 저항하자고 호소하는 ‘6·18 호소문’을 연설한다. 그 후 그는 1943년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에서 결성된 국민해방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해 대독 항쟁을 계속했다. 드골은 뛰어난 정치력을 바탕으로 북아프리카를 포함해 세계 전역에 흩어져 있던 프랑스군에 대한 지휘권을 1944년 3월까지 대부분 회복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드골은 파리를 수복하기 위해 그해 8월 23일 랑부예 성에 도착해 사령부를 설치했다. 주로 식당으로 사용되던 ‘정오의 방’에서 드골은 자유프랑스군의 제2기갑사단장인 르클레르 장군을 만나 진군 작전을 결정했다. 드골로부터 파리 수복의 특명을 받은 르클레르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파리를 거치지 말고 동부전선 쪽으로 곧바로 진격하라는 연합군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파리로 진격해 수도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1944년 8월 25일 드골은 개선장군으로 파리를 수복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프랑스의 주권을 회복했다. 그 후 드골은 1958년 프랑스 제5공화국을 설립하고 1959년부터 1969년까지 프랑스의 첫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대통령의 공식 여름 휴양지 역할을 한 랑부예 성은 국제회의 장소로도 쓰였다. 현재 G8 정상회의의 모태인 G6 정상회의가 1975년 11월 6개국(미국·영국·서독·프랑스·이탈리아·일본)이 모인 가운데 이곳에서 열렸다.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 대립의 발단이 된 코소보 전쟁(1998~1999) 당시 미·영·프 등의 중재단과 유고·알바니아계 대표가 참석한 코소보 평화회담이 1999년 2월 이곳에서 열리기도 했다. 이처럼 랑부예 성은 프랑스의 전쟁사가 오롯이 담긴 건축물이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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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국방일보 2019년 11월 11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91111/1/BBSMSTR_000000100082/view.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