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박물관(하)

나폴레옹은 전리품을 모았고 
勝者(승자)의 역사는 예술로 기록했다

[국방일보 기획칼럼 -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2>루브르 박물관 (하)

나폴레옹은 전리품을 모았고 
勝者(승자)의 역사는 예술로 기록했다 
<2>루브르 박물관 (하)

1794년 벨기에 침공 후 수집 시작    
약 5000점에 달하는 전리품 약탈 
    
집권 시기 ‘나폴레옹 박물관’ 개칭    
박물관 입구 ‘카루젤 개선문’ 세워    
워털루 전쟁 후 전리품 일부 반환    
    
루브르 박물관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의 전쟁사가 있다. 나폴레옹은 1784년 파리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뒤 1785년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 때 코르시카국민군 부사령관으로 취임했다. 1799년 11월 쿠데타 성공으로 실권자가 된 그는 1804년부터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를 지냈다. 영국과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대패했으나 오스트리아를 무너뜨리고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켰으며, 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을 굴복시켜 유럽 대륙을 제패했다.

유럽 최고의 예술품 소장한 루브르     
     
전쟁을 많이 벌였던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기까지도 프랑스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이용해 왕궁의 문화재 소장품을 늘리는 것을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달랐다. 프랑스를 모든 문명 세계의 순수 예술품을 한곳에 모아 놓은 공인된 중심지로 만들려는 열망을  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집권 시기에 루브르 박물관은 유럽 최고의 예술품을 소장한다. 나폴레옹은 전쟁 승리로 약 5000점에  이르는 전리품을 프랑스로 보냈다.     
     
1794년 벨기에 침공 이후부터 나폴레옹은 본격적으로 유럽 전역의 교회와 궁중에서 전리품 수집을 시작했다. 1796~1797년 이탈리아 원정으로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해 카스틸리오네 전투, 아르콜 다리 전투, 리볼리 전투 등으로 오스트리아가 주축을 이룬 대프랑스 동맹군을 격파했다. 나폴레옹은 각 분야 전문가와 학자들을 대동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주요 예술품을 포장해 루브르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은 프랑스 군대의 주요 업무였다.

이집트관 신설은 이집트 원정의 결과물     
     
프랑스 혁명정부는 전략적 요지인 이집트를 식민지로 만들어 영국을 막고자 했다. 또한 급격히 떠오르는 나폴레옹을 프랑스로부터 멀리 격리하려고 이집트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798년 5월, 나폴레옹은 3만8000여 병력과 350척의  함선으로 툴롱을 출발해 이집트 원정을 떠났다. 그해 7월 카이로에 진군해 맘루크족과의 피라미드싸움에서 승리하고 이집트를 장악했다.      
     
나폴레옹은 이때 고고학자와 천문학자, 수학자, 화학자, 사서, 인쇄공, 토목기사, 광산기사, 화가, 인문학자 등  175명을 데리고 유적지 탐사활동에 나섰다. 이 중에 고고학자 도미니크 비방 드농이 동행하면서 전리품 약탈 수가 급격히 늘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게 바로 루브르 박물관의 드농관이다.

로마 개선문 모방한 카루젤 개선문 
     
나폴레옹은 영국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등 유럽의 여러 나라와 싸운 ‘나폴레옹 전쟁’(1799~1815)을  벌이며 유럽 전역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나폴레옹의 쿠데타 1주년 기념일인 1800년 11월 9일에 루브르 박물관은 고대 조각들을 전시한 고대 미술관을 개관했다. 루이 16세 때 ‘중앙예술박물관’이라는 명칭을 얻은 루브르 궁은 1803년 나폴레옹 집권과 함께  나폴레옹 박물관을 뜻하는 ‘뮈제 나폴레옹’으로 바뀌었다. 1804년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은 세계 최고의 박물관을 건립해 전쟁의  전리품을 국민, 더 나아가 인류에 재분배하겠다고 공표했다.

나폴레옹은 1805년 10월 울름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동맹군에 승리했다. 1806년에는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이겼다. 1807년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와 프로이센군을 격파했고, 1809년 7월 바그람 전투에서 승전고를 울렸다. 나폴레옹은 1805년까지의 전승을 기념해 루브르 박물관 입구에 1806년부터 1808년까지 3년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카루젤 개선문을 세웠다. 프랑스 제국을 있게 만든 군대 ‘그랑드 아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로마의 셉티므 세베르 개선문을 모방했다. 이는 나폴레옹이 로마제국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카루젤 개선문의 높이는 14.6m, 너비는 19.5m이다. 문 위에는 나폴레옹이 1797년 이탈리아 원정 때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에서 가져온 네 마리의 청동상이 있었다. 하지만 1815년 워털루 전쟁 패배 후 이탈리아에 반환됐다. 대신 1828년 프랑수아 조제프 보시오가 여신상을 중심으로 한 마차와 병사의 상을 만들었다.
     
1811년 나폴레옹 박물관은 절정에 달했다. 고대관은 확장돼 400개 이상의 조각상을 전시했으며 그랑 갤러리에는 9개의 전시실에 1176점의 그림을 선보였다. 다만 이베리아 반도 전쟁의 실패와 영국 침공 포기로 두 지역의 작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워털루 전쟁 패배, 루브르에 불러온 영향
     
모든 걸작을 다 모아 놓은 단 하나의 박물관을 만들려는 황제의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몰락의 길을 걷는다.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의해 전쟁에서 패배하고 다음 해에 실각하게 된다. 유배됐던 엘바 섬에서 도망쳐 나와 권력을 다시 잡고 1815년 워털루 전쟁을 벌이지만 영국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패배하면서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이후 1815년 빈 회의에서 오스트리아와 영국, 프러시아, 러시아, 프랑스 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이 결과로 루브르로 보내졌던 전리품들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1815년 7월부터 11월 사이에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시대에 약탈해온 회화 2065점, 동상 280점, 청동 289점, 에나멜(페인트 작품) 1199점이 원 소유국으로 반환됐다. 이는 전체 전리품의 5분의 4에 해당한다.
     
이후 복고왕정과 함께 부르봉가의 루이 18세가 즉위하면서 루브르 박물관은 나폴레옹 박물관에서 다시 왕립박물관으로 명칭이 바뀐다.     
     
루브르 박물관은 나폴레옹의 재위하에 전형적인 국가 박물관이 됐고 이후 전 세계 국립박물관의 본보기가 됐다. 나폴레옹은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1807), ‘장군 보나파르트의 미완의 초상’(1797), 화가 앙투안 장 그로의 ‘아일라우 전투의 나폴레옹’(1807), ‘자파의 페스트 격리소를 방문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804) 등의 작품으로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만약 나폴레옹의 전쟁이 없었다면 루브르 박물관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칼럼은 국방일보 2019년 7월 8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90708/1/BBSMSTR_000000100082/view.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