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노선

마지노요새, '난공불락 믿음'… 무용지물의 대명사로

[국방일보 기획칼럼 -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13> 프랑스의 마지노선

마지노요새, '난공불락 믿음'… 무용지물의 대명사로

<13> 프랑스의 마지노선

프랑스 750㎞ 방어선 구축…국방장관 앙드레 마지노 이름서 유래
벙커만 수천개 최강시설이었으나 독일군 전술에 밀려 6주 만에 패배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기 전인 1936년 독일과의 전쟁을 대비해 마지노선(Maginot Line)을 구축했다. 총 길이는 750㎞로 스위스부터 룩셈부르크에 이르는 프랑스-독일 국경 지대에 대략 5㎞마다 요새가 놓였다. 당시 프랑스가 가진 축성기술을 총동원한 마지노선은 지하 설비와 대전차 방어시설을 갖춘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겨졌다. 하지만 서유럽 최강의 육군을 가진 프랑스는 마지노선으로 인해 독일에 단 6주 만에 패배했다.

佛 국방장관 앙드레 마지노 제안으로 건설

독일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집권한 후 프랑스 군부는 공격이 아닌 방어를 택했다. 그 중심에는 앙드레 마지노(1877~1932)란 인물이 있다. 그는 1913년 36세에 하원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으나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부사관으로 자원입대했다. 마지노는 1916년 프랑스와 벨기에의 전선인 서부전선에서 가장 거대한 전투인 베르덩전투에 참전했다. 1차 대전은 참호전이 주를 이뤘는데 참호에 구축한 기관총 공격으로 불과 몇 미터를 전진하는 데 수천 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프랑스는 독일군 공격에 맞서 콘크리트 포대를 사용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는데 이는 수십만 발의 독일군 포격을 견딜 만큼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노는 이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후송됐다.

마지노는 이후 두 번에 걸쳐 프랑스 국방장관을 지냈다. 그는 1926년 독일과의 국경선 일대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한다는 계획을 제안한다. 자신의 참호전 경험을 토대로 든든한 방호벽을 만드는 전략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프랑스 ‘동북국경 축성안’을 1927년 의회에 제출했는데 예산 확보 등의 문제로 1929년에야 안이 통과됐고 1930년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한다. 하지만 마지노가 1932년 1월 7일 세상을 떠나면서 이 계획을 이어받아 실현한 인물은 수학자 겸 정치가인 폴 팽르베(1863~1933)였다. 마지노는 적 공세를 알리는 조기경보와 지연전을 수행할 전초 방어선을 만들고자 했는데 팽르베는 이를 토대로 더욱 공고한 요새를 짓기로 한다.

프랑스 수호할 철벽으로 여겨져

마지노의 이름을 딴 마지노선은 1936년 완공됐다. 건설에만 160억 프랑(현재 한화 약 20조 원)이 들어갔고 유지 보수에만 140억 프랑(현재 한화로 약 17조 원) 이상이 소요됐다. 국경을 따라 설치된 장벽에는 142개 요새와 352개 포대, 그리고 5000여 개의 벙커가 설치됐으며 지하로 연결되도록 했다. 규모가 큰 요새의 경우 1000명 이상의 병력을 수용하도록 지어졌다.

마지노선은 전투 공간뿐만 아니라 대규모 병력이 상주해 생활할 기반시설을 갖췄다. 강철과 콘크리트로 지은 이 요새의 가장 얇은 보루의 두께도 3.5m나 됐다. 그렇게 마지노선은 프랑스 국민에게 ‘난공불락’이라는 믿음을 줬다.

독일군 낫질작전으로 마지노선 우회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대전이 발발했다. 프랑스는 육군 92개 사단 중 50개 사단을 마지노선에 배치하며 병력과 화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국민의 신망을 받은 군사 건축물이 한심한 콘크리트 덩어리로 판명 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독일군 낫질작전으로 마지노선 우회

1940년 5월 10일 새벽 5시 35분 독일 히틀러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이 제안한 ‘낫질작전(Sichelschnitt)’을 펼쳤다. 독일 기갑부대는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동부, 프랑스 북부에 걸쳐 있는 고원 삼림지대인 아르덴 숲을 돌파했다. 마지노선 북부인 이곳은 언덕이 많고 숲이 우거져 프랑스는 약한 방어망을 설치했는데 독일은 이 빈틈을 노렸다. 독일은 마지노선 전방에 불과 17개 사단만을 배치해 프랑스의 50개 사단을 견제하며 시선을 돌린 것이다. 독일군은 작전 개시 6주 만에 파리에 입성했다. 요새에 갇힌 프랑스군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항복했다. 1940년 6월 17일 프랑스 수상에 취임한 필리프 페탱이 휴전을 제의해 6월 22일 파리 근교에서 프랑스는 항복했다.

한편 마지노선은 독일에 의해 단 한 곳이 뚫렸다. 라 페르테(La Ferte) 요새다. 1940년 5월 19일 독일군 중위 알프레드 게르머가 벙커 내부에 던진 폭탄으로 화재가 발생해 연쇄 폭발이 일어났는데 당시 안에 있던 107명의 프랑스군은 벙커를 지키라는 상부 명령으로 탈출하지 못하고 전멸했다. 이 일은 ‘지하의 비극(Tragedie Souterraine)’이라고 불린다.

현재 호크발트 요새만 군사용으로 쓰여

제2차 대전에서 별다른 역할을 못한 마지노선은 보수 작업을 거쳐 1970년 이전까지 핵전쟁을 대비한 대피소로 운용됐다. 마지노선 북단인 로렌 지방의 로콘빌러(Rochonvillers) 요새는 프랑스 제1군이 1981년부터 1998년까지 지휘소로 사용했다. 지금은 프랑스 북동부 지역의 호크발트(Hochwald) 요새만이 프랑스 공군의 드라첸브론(Drachenbronn) 기지 일부로 군사적 기능을 하고 있다.

마지노선 실내온도는 일 년 내내 12~13℃로 유지된다. 이 때문에 많은 요새가 와인 저장고나 버섯 농장으로 개조됐으며 10여 개 요새는 관광지가 됐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최후의 보루’라는 뜻과는 사뭇 다른 마지노선의 허망했던 전쟁의 결과는 여전히 프랑스 전쟁사의 아픈 부분으로 기록돼 있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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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국방일보 2019년 9월 23일 월요일 기획 15면에 게재됐습니다.)

원문 : http://kookbang.dema.mil.kr/newsWeb/20190923/1/BBSMSTR_000000100082/view.do